var url1='whateverwelcome.tistory.com'; var url2='whateverwelcome.com'; var online=document.URL; if(online.match(url1)) document.location.href=online.replace(url1,url2); 어려운 한국사 인물로 풀기 - ① 파란만장한 삶, 나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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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한국사 인물로 풀기 - ① 파란만장한 삶, 나혜석

무엇이든웰컴 2023. 6. 29. 12:48

1948년 무연고자로 쓸쓸히 죽어간 여자가 있습니다. 바로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진보적 여성 운동가, 문필가로 이름을 날린 나혜석인데요. 이렇듯 화려한 이력의 소유자가 왜 그 당시에는 그토록 초라하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걸까요?

파란만장했던 나혜석의 삶을 들여다봅니다.

 

나혜석(1896 ~ 1949)

1. 선택받은 천재화가

나혜석은 1896년 4월 28일 경기도 수원의 명문가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나기정(羅基貞)과 어머니 최시의(崔是議) 사이의 2남 3녀 중 넷째(차녀)였죠. 아버지였던 나기정은 보수적인 사대부 집안의 사람이었으나 성별을 가리지 않고 자녀들에게 신교육을 받게 하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입니다.그 덕에 나혜석은 당시 여성들 중에선 특출난 편이였고 고등학교까지 나와 미술을 익혔습니다. 삼일여학교, 진명여학교, 일본유학을 거치며 학문과 식견을 넓혀가던 나혜석은 남성중심의 사회구조를 향한 비판을 담은 글들을 여러 잡지에 투고하기 시작했습니다.

 

2. 남다른 결혼과 세계일주여행, 그리고 이혼
다양한 글들을 통해 당시 남성 중심 사회를 비판하던 나혜석은 집안에서 결혼하라는 압력을 이겨내지 못해 결국 일본 유학 당시 연인이었던 최승구와 약혼을 하기로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최승구는 폐렴과 결핵에 시달리다 25세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해버리고 말았고, 이렇게 첫사랑을 떠나보낸 나혜석은 심히 슬퍼하며 집안에서 권유하는 모든 중매자리들을 거절했습니다. 그러다 오빠 나경석의 소개로 교토에 있는 김우영을 만나게 되었고, 청혼을 받아 결혼하기로 하죠.
이때 나혜석은 결혼 전 4가지 조건을 들며 이를 허락해야만 결혼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평생 지금처럼 사랑해 줄 것,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 말 것,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별거하게 해줄 것, 최승구의 묘지에 비석을 세워줄 것' 입니다. 

 

이러한 조건들을 김우영은 모두 받아들이고 나혜석과 결혼식을 올립니다. 이후 김우영과 나혜석은 꽤나 좋은 부부관계를 이어가며 후술할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 딸 하나와 아들 둘을 두었습니다. 결혼때의 약속대로 나혜석은 큰 간섭없이 자유로이 작품활동을 이어나갔고, 뿐만 아니라 여성운동, 항일운동, 독립운동 등 다양한 사회적 활동들을 이어나가며 자신의 영향력을 넓혀갔습니다. 그녀의 전시회에는 첫날에만 5,000여 명이 다녀갈 정도로 성공한 삶을 살았죠.

그러다 남편 김우영은 일본 외무성이 주는 해외 위로여행 포상의 대상자가 되었습니다. 나혜석은 남편을 따라 부부동반으로 세계일주를 하게 되었고 그렇게 둘은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아시아를 넘어 한 달 만에 파리에 도착합니다. 스위스,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 스웨덴, 노르웨이 등 서양의 다양한 국가들을 관광하며 그녀의 사상과 작품세계는 더욱 발전하게 됩니다. 그러나 세계여행은 그녀에게 행복과 불행을 동시에 안겨다 주었습니다.

파리에서 만난 천도교 지도자 최린과의 만남은 그녀의 인생을 뿌리부터 뒤흔들었죠. 3·1운동 때 함께 투옥된 경험이 있고 취미가 다양하며, 그림에도 조예가 있는 최린은 한순간에 나혜석을 사로잡았습니다. 법 공부를 위해 독일로 떠난 김우영은 최린에게 나혜석을 부탁했고, 남편이 떠난 뒤 시작된 두 사람의 깊은 교제는 재불 조선사회를 시작으로 조선까지 널리 소문이 퍼지게 됩니다. 분노한 김우영이 자신이 있던 베를린에서 짐을 싸고 나혜석이 있는 파리로 오면서 나혜석과 최린의 불륜은 끝나게 되며 둘은 1930년, 10년간 이어오던 부부관계에 막을 내렸습니다. 이혼 이후 나혜석은 많은 것을 잃게됩니다. 화가로써의 명성도 실추되었고 아이들의 양육권을 남편 김우영이 가져가게 되면서 자식들을 볼 수 없게 됐죠.

 

3. 비참한 최후

남편과 최린으로부터의 버림. 그러나 그녀는 이에 굴하지 않고 활발하게 그림 활동을 하며 동시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이혼고백서]를 1934년 잡지 <삼천리>에 게재했습니다. 이 글을 통해 나혜석은 자신이 이혼에 이르게 된 경위와 그 과정에서 김우영이 보인 편협함, 그리고 남성이기주의를 상세하게 묘사했고 거센 비판의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이혼고백서]는 결혼에서 이혼에 이르게 된 경위를 적나라하게 쓰고 남성중심의 조선사회를 고발하는 수기였습니다. 부부 사이의 치부마저도 드러낸 것이죠. 이 글에서 그녀는 정조관념을 지키라고 하는 사회 관습을 비판하고 그런 관념은 상대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므로 해체되어야 한다고까지 주장했습니다.

말년의 그녀는 대인기피증과 우울증에 시달렸으며 나이가 들자 파킨슨병과 중풍에 시달립니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여성운동을 위한 강연을 계속하였고 추후 사회와 멀어지기 위해 절에 귀양까지 해보려 했지만 같은 여성운동가 김일엽에게 자격이 못됨을 지적받고 포기했습니다. 끝내 몸과 마음 모두가 쇠약해져 요양원에 신세를 지게 되죠.

자식들을 악마라 칭하며 폄하하던 그녀는 말년에 들어서야 자식들을 그리워해 화가로 명성이 높았던 파리로 떠나지 않고 국내에 남았다고 합니다. 시집살이와 현모양처를 비판했던 그녀는 말년에 시어머니의 사망소식에 애정에 시댁을 찾아갔다가 쫓겨나기도 하고, 자식은 악마라며 폄하했다가 죽기 전애는 자식들을 만나보고싶어해 여러 번 만남을 시도했지만 김우영은 이러한 나혜석의 자식상봉을 막기위해 경찰을 동원하였습니다.

그녀는 죽는 순간까지도 자식들을 보기 위해 요양원에서 탈출까지 저질렀으나 결국 길에서 쓰러진 채 발견되었으며, 1948년 12월 10일 저녁 8시 30분 서울시립자제원 무연고자 병동서 영양실조로 사망합니다.

 

사회적·경제적으로 혜택을 받은 엘리트 여성 나혜석. 그녀의 여성해방론은 가부장적 사회제도와 남성 중심의식에 대한 과감한 도전이었습니다. 학계로부터 신여성이라 불리며 계몽운동을 이끈 위인들 중 하나로 평가받는 그녀지만, 이와 반대로 그녀가 외적으로 보여준 부정적인 요인들 때문에 대중들 사이에선 "정말 위인으로 삼을만한 사람인가?"라는 주제로 현재까지 호불호가 많이 갈리고 있습니다. 교과서나 tv프로그램 등에서는 그녀를 시대에 저항한 여성운동가로서 묘사하곤 있지만, 지금도 논란이 될 법한 페미니즘 성향과 말년에 보여준 본인의 내로남불적인 행태들로 인해 그녀를 신여성의 상징으로 치켜세워줄 수 없다는 의견도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